기름기가 쫙 빠져 담백하면서도,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돼지고기 수육. 오늘날 '보쌈'이나 '동파육'과 같은 요리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 '부드러운 돼지고기'의 원형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바로 '연저육'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연저육은 이름부터 '연한 돼지고기'라는 뜻을 가진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 즐겨 먹던 최고급 돼지고기 찜 요리입니다. 단순히 고기를 삶은 요리가 아니라 술과 장, 그리고 긴 시간의 정성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부드러움을 자랑했던 요리였습니다. 오늘은 『규합총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잊혀진 우리 고급 육식 문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연저육의 세계를 탐험해 보겠습니다.
1. 연저육이란 무엇인가?
연저육은 한자 뜻 그대로 '연할 연', '돼지 저', '고기 육' 자를 써서 '매우 연한 돼지고기'를 의미합니다. 이름 자체가 조리법의 핵심 목표, 즉 '극강의 부드러움'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요리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끓는 물에 데쳐 불순물을 제거한 뒤 술(주로 청주)과 간장, 꿀, 향신료 등을 넣고 약한 불에서 아주 오랜 시간 뭉근하게 찌거나 조려내는 방식으로 만듭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알코올과 장의 성분이 고기 깊숙이 스며들어 돼지고기 특유의 잡내는 완벽하게 잡고 지방과 육질은 입에서 녹을 듯이 부드럽게 변하게 됩니다.
2. 『규합총서』가 기록한 양반가의 고급 보양식
연저육의 구체적인 조리법은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규합총서』에 매우 상세하고 먹음직스럽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연저육이 비중 있게 실렸다는 것은 이 음식이 당시 사대부 가문에서 손님 접대나 집안 어른의 보양식으로 널리 사랑받던 격식 있는 고급 요리였음을 증명합니다.
"돼지고기 껍질을 불에 그슬려 털을 없애고 삶아낸다. … (중략) … 좋은 청주 한 사발에 꿀과 간장을 타서 고기가 잠기도록 붓고, 파를 많이 깔고 그 위에 고기를 얹어 아주 약한 불로 오래도록 고아낸다. 고기가 다 무르면 썰어서 상에 낸다."
이 기록은 연저육이 단순히 물에 삶는 방식이 아니라 술과 장으로 맛을 내는 '조림'과 '찜'의 중간 형태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아주 약한 불로 오래도록 고아낸다'는 부분은 부드러운 식감을 위한 핵심 기술인 '저온 장시간 조리'의 원리가 이미 조선시대에 적용되었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3. 연저육의 재료와 전통 조리법
연저육은 귀한 돼지고기의 맛을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한 정성이 가득한 요리였습니다.
주재료: 껍질이 붙어있는 돼지고기(오겹살 또는 삼겹살), 좋은 청주
부재료: 꿀, 간장, 생강, 파
조리법:
1) 돼지고기 덩어리는 껍질의 잔털을 불에 그슬려 제거하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내 불순물과 기름기를 뺍니다.
2) 냄비나 솥 바닥에 파를 넉넉하게 깔아 고기가 눌어붙는 것을 방지하고 향을 더할 준비를 합니다.
3) 파 위에 데쳐낸 돼지고기 덩어리를 올립니다.
4) 청주에 꿀과 간장, 저민 생강 등을 풀어 고기가 잠길 정도로 자작하게 붓습니다.
5) 뚜껑을 덮고 불이 꺼질 듯 말 듯 한 아주 약한 불에서 몇 시간이고 푹 고아냅니다. 중간에 국물이 졸면 술을 더 부어가며 타지 않게 합니다.
6)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속까지 완전히 부드럽게 익었으면 고기를 건져 한 김 식힌 뒤 먹기 좋게 썰어냅니다.
4. 현대 요리와의 연결고리 (보쌈, 동파육)
비록 '연저육'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그 조리법과 결과물은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여러 돼지고기 요리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첫째, '보쌈'의 원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잡내 없이 부드럽게 삶아낸 돼지고기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보쌈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만, 물 대신 술로 익혀내는 방식이 훨씬 더 고급스러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중국의 '동파육'과 조리 원리가 거의 같습니다. 동파육 역시 돼지고기를 간장과 술에 오랜 시간 조려내어 부드러운 식감을 만드는 요리입니다. 연저육은 우리식 동파육, 혹은 동파육의 원조 격으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합니다.
5. 마무리
연저육은 돼지고기가 낼 수 있는 최상의 부드러움을 구현해 낸 요리였습니다. 한 점의 고기를 위해 몇 시간의 정성을 쏟았던 그 과정에는 음식을 대하는 선조들의 진지한 태도와 미식에 대한 깊은 탐구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부드러운 보쌈이나 돼지고기 찜을 맛볼 기회가 있다면 그 뿌리에 있던 '연저육'이라는 이름을 한번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시간과 정성이 만들어낸 깊은 맛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더욱 풍요로운 식사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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