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희귀한 전통 음식

향란주, 난초 향을 빌려온 전설 속 명주

반응형

술에 과일이나 꽃을 넣어 향을 더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풍습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국화주, 일본에는 벚꽃 잎을 담근 벚꽃주가 있듯이 향긋한 식물을 활용한 술은 오래전부터 사랑받아왔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즐겼던 술 가운데에는 한층 더 특별한 술이 있었습니다. 꽃이나 잎을 술에 넣는 대신에 그저 향만을 스며들게 한 술이자 사군자 중 으뜸으로 꼽히는 난초의 맑고 고고한 향기를 빌려와 빚은 술, 바로 향란주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향란주란 어떤 술이고 문헌 기록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살펴본 다음, 현재는 향란주를 보기 어려운 이유와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1. 향란주란 무엇인가?


향란주는 이름 그대로 “난초의 향이 담긴 술”입니다. 그러나 난초를 술에 넣어 우려내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정성껏 빚은 약주가 술독 안에서 익어갈 무렵에 선비들은 방 안에 난초 화분을 함께 두었습니다. 외부 공기를 완전히 차단한 깨끗한 공간에서 술독이 숙성되는 동안에 난의 은은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차고 그 향기가 아주 서서히 술독 속 술에 스며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성분이 아닌 향을 술에 담가내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란주는 단순히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술 한 잔 끝에 살짝 남는 향기를 음미하며 마음을 맑히는 풍류의 술이었습니다.


2. 문헌 속의 향란주


향란주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남긴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독을 밀봉하고 그 곁에 향기로운 난초 화분을 두면, 술에 저절로 향기가 스며든다. 이는 매우 운치 있는 일이다.”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향란주의 정체와 당시 선비들의 생활, 가치관을 잘 보여줍니다. 난초를 단순한 관상용이 아니라 술에 향을 입히는 매개로 삼았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맛’보다 ‘향’을 중요시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난초는 고결함과 청아함을 상징하는 식물입니다. 흔히 사군자 중에서도 가장 군자의 기품을 담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난초 향을 술에 담가내는 행위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풍류적 행위였습니다.


3. 향란주의 제조법


향란주의 제조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술보다도 까다롭고 섬세했습니다.

 1) 잘 빚은 청주 또는 약주를 술독에 담는다.

 2) 향이 가장 짙을 무렵 난초가 활짝 핀 화분을 준비한다.

 3) 외부 공기가 통하지 않는 깨끗한 방에 술독을 두고 곁에 난초 화분을 놓는다.

 4)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방 안에 가득한 난의 향이 서서히 술에 스며들기를 기다린다.

 5) 시간이 흐른 뒤, 술을 따를 때 은근하게 배어든 난초 향을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은 요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술에 난초의 향을 입히는 것보다도 술독과 난초를 한 공간에 두고 조용히 기다리는 그 시간이 바로 향란주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4. 왜 전설로만 남았을까?


향란주는 지금은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술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 안전성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시중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난초는 관상용으로, 병충해를 막기 위한 농약이나 살균제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난초를 술을 빚는 공간에 함께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정확한 품종을 알 수 없습니다. 옛 문헌에는 그저 '향이 좋은 난'이라고만 되어 있어 과거 선비들이 향란주를 만들 때 어떤 품종의 난을 사용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셋째, 제조법의 극단적인 섬세함입니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공간에서 오직 자연 발향만으로 술에 향을 입히는 기술은 현대적인 양조 환경에서 재현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술의 향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강한 맛과 향에 익숙한 현대인의 기준에서는 '향이 거의 없는' 술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5. 향란주에 담긴 선비들의 정신


향란주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술의 한 종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는 선비들이 추구했던 자연과의 교감, 정신의 맑음, 느림의 미학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술은 학문과 사색, 풍류와 연결된 삶의 일부였습니다. 난초의 향을 술에 담가내는 행위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마무리

향란주는 우리에게 술이 취하는 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술 한 잔에 자연의 향기를 담고 그 향을 음미하며 정신을 맑게 하고자 했던 조선 선비들의 풍류는 오늘날 우리가 잊고 있던 '쉼'과 '사색'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 향을 직접 맡을 수 없어 전설로만 남았지만, 향란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때로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난초의 향을 빌려 술을 빚던 선비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우리 술 문화의 깊고 그윽한 향기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출처

 

  • 《산림경제》
  • 《임원경제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반응형